절반의 잎사귀

소라게도 아닌 것이 삶의 무게를 짊어지지를 않나 개미도 아닌 것이 더듬더듬 거리지를 않나 거실에 깔린 초록색 러그 살며시 올라타 가장자리부터 갉아 먹는다 올라가는 것도 한 세월 먹는 것도 한 세월 오전에 베란다에 널어놓은 빨래도 말랐고 창문 밖에서 떠들던 멧비둘기와 붉은머리오목눈이도 떠났고 서로에게 새겼던 감정의 글자가 하나씩 옅어지고 태양은 부끄러운지 붉어진 얼굴을 고개 숙여 감춘다 그제야 … 더 읽기

분홍빛 봄바람에 우산 쓴 난쟁이

공기 방울에 떠밀려 흩날리는 민들레 홑씨어디론가 날아가 바닥에 내려 앉더니지나가던 난쟁이가 주워마침 떨어지는 소나기에조금이라도 젖지 않으려 우산처럼 쓰더라 거대한 물방울 하나, 둘, 셋,실수한 날 밤 세던 양떼처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때어느덧 그늘은 사라지고넘실거리는 분홍빛 봄바람 시나브로푸른색 하늘에 새겨지는 민들레 은하수메리 포핀스의 친구라도 된듯새의 지저귐을 방향삼아바람을 깔고 앉아 또 한번 날아간다 강줄기와 연잎, 자갈과 … 더 읽기

모빌을 꿈꾸던 발굽

간판이 벽돌을 헤엄치던가계단이 지평선을 배회하던가글자 바람에 나부끼는 연홍색울타리였던가 마룻바닥이었던가 수레 붙은 천막 그 좁은 틈 사이에진하게 아지랑이 핀 개나리 풀숲연석 위 난쟁이들의 대행렬과흩뿌려져 날아가는 무지개그건 풍선이었던가 깃털이었던가 숨 가삐 달리면서도도심 속 롤러코스터맨 앞자리 나란히 앉아 바람을 맞을 때자동차, 넝마, 놋쇠그릇과 쳇바퀴가우리 주위에 우레와 같이 쏟아지고 나뭇가지와 대리석 붙은 금자탑을 오르며우산도 쓰고 갈대도 불고바람에 네 머리칼이 … 더 읽기

쇳물

땅 땅 땅그 놈이 또 나를 때린다 난 휘어지고구부러지고망가지고아프다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면내 고개를 차가운 물에 처박고서는일어나숨쉬어엄살피지마 이게 죽는 걸까차가워 몸을 떨고 있으면다시 땅 땅 땅그 놈이 또 나를 때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정신을 잃고 지옥같은 시간이 지나면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렇지 않다아무렇지 않다아무렇지 않다아무렇지 않아? 파편이 떨어지고껍데기는 바스라지고자국들이 선명해지는데어떻게 아무렇지 않겠어 땅 땅 땅다만 더 이상 … 더 읽기

잔광

커패시터는 전기를 담는 일종의 그릇이다가전제품의 콘센트가 별안간 빠져버려도바로 꺼져버리는 게 아니라LED 불빛을 찬찬히 남기는데그릇에 남은 잔존 전력이회로의 파손을 막기 위해 뒷정리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크든 작든 누구나 그릇을 가지고 있다어렸을 때는 이 마음의 그릇에별빛이 소담하게 담겨 주위를 환하게 하는데세상에 드리우는 어둠은우리의 불씨를 앗아가곤 한다 어떤 이들은 그림자에 잡아먹혀스스로가 그늘이 되곤 하지만나는 그렇게 쓰러진 이들에게도그 어떤 … 더 읽기

무제

달이 떴다여전히 밝다오늘은 둥글다소원을 빈다 비가 내린다라디오를 켰다음악을 듣다가도빨래는 걷어야지 파도가 친다발에 닿는다모래를 훔쳐간다나도 쓸려가려나 너는 존재한다달이 둥근 것처럼옷가지가 젖은 것처럼슬픔이 부서진 것처럼 너는 존재한다있어서가 아니라마주해서나와 마주해서둥근 걸 알고젖은 걸 알고부서진 걸 알아서너와 내가 존재한다

이름 없는 별

어두운 하늘에 누군가별 조각 몇 개를 흘리고 간 모양이다쌍둥이가 맞댄 어깨라든가오리온이 두른 허리띠라든가 그런데 그날의 그 별은 유난히 빛났다사자와 곰 사이에서도무척이나 용감하게자신의 몸을 도거리로 부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너를 기억한다시간의 풍화에 옅어지는 너의 얼굴도소리도향기도 끝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하늘을 바라보며 포갠 두 손만은아릿한 감각으로 기억한다 투박한 내 손을 부드러이 쥐고가장 빛나는 별들을 표지판 삼아한 걸음두 걸음그리고 … 더 읽기

사람이 죽으면

누군가는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전부 사라지는 거래 그런데 죽음에 관해,어떤 종교인은 사후세계 혹은 새로운 인생이 있다 말하고어떤 철학자는 태어나기 전과 같이 순수하고 완전한 상태가 된다 말하고어떤 역사가는 기록으로 남아 후대에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라 말하고어떤 과학자는 원자가 남아 우주의 일부분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 말하고나의 스승님은 빛과 어둠처럼 삶과 죽음은 공존하는 것이라 말하고옆집 아저씨는 사는 … 더 읽기

점의 존재

모든 것들은 순간의 존재달리 말하면 잠깐의 존재찰나의 존재원자가 진동하기 직전의 존재되돌아갈 곳은 없고 나아갈 곳만 있는 존재점의 존재 현재는 점이다시간은 종종 선처럼 보이지만그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형상과 관념일 뿐모든 것들은 결국 점에 놓여있다점은 태어나자마자 죽는다동시에, 점의 무한한 탄생은마치 점이 소멸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끝없는 점멸현재의 불꽃이 꺼지면타고 남은 과거가 잿더미를 남긴다우리는 현재를 오롯이 알지 못하고과거라는 잔상으로 현재를 유추한다넘실대는 … 더 읽기

꿈을 꾸었습니다. 저는 매일 꿈을 꿉니다. 잠에서 깨면 꿈에 대한 기억은 굴뚝에서 피워오는 연기처럼 아스라이 사라지지만, 불을 꺼도 굴뚝에 온기가 남아있듯 출처 모를 감정이 얼굴에 남아있습니다. 왜인지 모르게 그 감정들은 소중한 것들이라서 참참이 기억의 계단을 되짚어보곤 합니다. 꿈의 배경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반면에 배경을 활보하는 인물들의 정황은 그렇지 못합니다. 대표적으로 주체인 ‘나’가 그러합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제가 …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