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툇마루

저녁놀 포근히 내려앉은시골집 툇마루 나이를 숨기려는 듯이옻칠한 이목구비 아름답게 윤난다 이도 잘 맞지 않아등에 기대면 나는 삐걱삐걱 소리 지금은 소음일 뿐인 그 소리가그때는 괜스레 좋았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무엇인가 늘 바쁜 어린아이여름철 하루종일 땀 흘리고해가 숨을 때 툇마루에 누워발로 바닥을 툭툭 치면그 정겨운 소리가 들려온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삐걱 소리에 장단 맞춰귀뚜라미 연주하고 개구리 노래한다너희도 나도 … 더 읽기

구르는 바퀴는 언제나 닳는다

그리는 연필은 뭉뚝해지고구르는 바퀴는 언제나 닳는다 상처로 가득하고닳아 없어질 것 같은 나의 몸은어제의 내가 힘차게 구른 탓이리라 바닥에 붙은 흑연아스러진 살갗이 자취에 나부낀다 끝을 헤아릴 수 없는한없이 뻗은 광야 멀리서 바라본 상처의 파편들은먼지 한 톨보다 작아 보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지만그 덕에 내가 더 나아갔음을 안다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남지 않은 것은어제와 오늘이 같다는 증거다 그건 … 더 읽기

눈, 그리고 나

자세히 보면 녹아 없어지기 바쁜무심코 보면 어느새 쌓여 있는뜨거울 정도로 시린얼음 알갱이가 쉼 없이 낙하합니다 나의 모습을 가까이서 주시하니아무것도 쌓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한 발짝 멀리서 무심코 쳐다보면꽤 먼 길을 걸어왔는데 말이지요 소복한 눈에 찍힌 발자국만이내가 남긴 유일한 족적은 아닐 겁니다방황이 일생의 업이었던 나에게흩날리는 눈발은 낯설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면 녹아 없어지기 바쁜무심코 보면 어느새 쌓여 있는시릴 … 더 읽기

파도가 치는 산

마른 잎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려서로에게 쉼 없이 부딪히니나는 정말로 산에서 파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다 향기는 나지 않았지만그래서 비로소 풀의 내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꽃들이 만든 향의 화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두 발을 딛고 있는 곳이평생을 흔들리다 떨어진 나뭇잎 위인지평생을 파도에 쓸려가던 모래알 위인지그렇게 결핍을 통해 내가 놓인 곳을 알게 됩니다 부족함을 등불 삼으니파도 소리를 들어도나는 … 더 읽기

LED

내 눈앞에 병사들의 수는 이백만그들은 밝은 빛을 뿜으며뜨겁게 죽어간다 무지개 빛깔의 파도들이아무렇지 않은 척 일렁거린다내 망막에 맺힌 건그들 혼자가 아니라그들이 잡은 손이었더라 그 숭고한 희생 덕에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무지하고 미개한 나라는 존재가쉽게 이해할 수 있는 거겠지 빛나는 모든 것이누군가의 눈을 쨍하게 하지 말기를그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기를 너의 색깔은빨강초록파랑

공전

세상이 도는 걸까아니면 내가 도는 걸까 서로 맞잡은 손꼭 맞잡은 손 작용그리고 반작용 내가 너를 밀어내듯이너가 나를 밀어내고내가 너를 잡아당기듯이너가 나를 잡아당긴다 우리 구심점은또 다른 구심점을 돌고그렇게 빙빙 빙빙빙 지구도 태양을 빙빙태양도 은하를 빙빙 세상이 돈다나도 돈다 누군가 손을 놔버리면더 이상 돌지 않겠지 나는 멀리 날아가고너도 멀리 날아가고 넓게 펼쳐진 우주의 도화지 위에나는 점너도 점 … 더 읽기

안녕

외국어는 만날 때와 헤어질 때 인사말이 나뉘어 있지. 만남과 작별의 감정은 분명 다르니까. 하지만 한국어는 둘 다 ‘안녕’이야. 비록 인사 후 우리는 헤어지지만 동시에, 언젠간 또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자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마. 안녕.

별똥별

내게 아주 먼 거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그러자 사람들의 바보 같은 행동을 하나 알게 됐다. 그것은 바로 수명이 다해서 떨어지는 인공위성을 별똥별로 착각하여 소원을 빈다는 것이다. 바보들. 난 진짜 별똥별이 떨어지면 그때 소원을 빌어야겠다. 그 뒤로 평생 동안 소원을 빌지 못했다.